체험기
여호와를 섬기는 일—내 평생의 천직
나는 1937
미국이 제
조니의 아버지인 오토는 아이오와 주 월넛에 있는 한 은행에서 은행장으로 있는 동안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토는 전 시간 전도 봉사를 하기 위해 그 직책에서 물러났습니다. 얼마 후 나는 오토와 그 가족의 훌륭한 본을 보고 격려를 받아 중요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어느 날 학과장은 내 성적이 떨어지고 있다면서 지금까지 이수한 학점으로는 졸업을 못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하면서 나를 인도해 달라고 청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공학 교수님이 나를 보자고 했습니다. 교수님이 건축 엔지니어 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전보를 받았는데, 내게는 묻지도 않고 내가 그 자리를 수락할 거라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교수님에게 감사를 표한 뒤, 내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천직으로 삼기로 결심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나는 1942
그 후 같은 해에 입영 통지서를 받은 나는 징병 위원회에 출두하여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양심상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내가 성품이 좋고 구조 공학 엔지니어로서 능력이 뛰어나다고 교수님들이 써 준 진술서도 제출했습니다. 그러한 호의적인 증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벌금 1
교도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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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관 몇 사람은 교도소에서도 정기적으로 성서 집회를 가지려는 우리의 노력에 협조해 주었습니다. 성서 출판물을 교도소 안으로 들여오도록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교도소장은 「위안」(지금의 「깨어라!」)지를 예약하여 구독하기까지 했습니다!
석방된 후 선교 봉사를 하다
나는 5
한번은 봉사하다가 이전에 교도소에서 만난 교도관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장 나가!” 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야구 방망이를 보고 겁이 나 얼른 그곳을 떠났습니다. 또 어떤 집에서는 한 여자가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말하고는 문을 닫았습니다. 잠시 후에 갑자기 위층 창문이 열리더니 설거지한 더러운 물이 쏟아져 몸이 흠뻑 젖었습니다. 하지만 봉사를 하면서 축복도 누렸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성서 출판물을 전한 몇 사람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1943
내가 골드코스트에 도착해서 맡은 일은 정부 관리와 유럽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말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회중과 함께 활동하면서 회중 성원들이 호별 방문 봉사를 하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외딴 지역에 있는 증인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전도 봉사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에 더해 인근의 아이보리코스트(지금의 코트디부아르)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로 섬기기도 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봉사하는 동안 나는 아프리카 원주민처럼 생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진흙으로 만든 오두막에서 자고, 손가락으로 음식을 먹고,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밖에서” 쪼그려 앉아 볼일을 보기도 했습니다. (신명기 23:12-14) 나와 동료 선교인들이 이렇게 생활한 덕분에 그곳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몇몇 현지 관리의 아내들이 우리와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켜 우리의 비자를 취소하라는 명령을 받아 냈을 때, 관리의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그로 인해 그 결정은 번복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는 많은 선교인처럼 나 역시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오한과 고열에 여러 차례 시달렸습니다. 때로는 턱이 너무 떨려서 아래턱을 붙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봉사를 하면서 계속 기쁨과 만족을 누렸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봉사한 처음 4
때로는 거친 바다를 지나며 22
가족을 돌볼 책임을 다하다
몇 년간 이버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던 중,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이 담긴 어머니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휴가를 내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가나로 돌아가 4
여러 해 동안 우리는 어머니를 교대로 돌보면서 몸이 괜찮으시면 집회에 갈 수 있도록 도와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1976
더 많은 변화와 만족스러운 삶
1988
가나에 다녀온 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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